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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정보/베트남 일반정보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흑백사진으로 본들 전쟁에서 흐르는 피를 가릴 수 있을 까. 칼라사진으로 복원된 베트남전쟁의 모습은 우리를 더욱 참회하게 한다. 호치민 시에 있는 베트남 전쟁박물관에는 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전차, 전투기, 미사일 뿐만 아니라 고엽제 등의 생화학 무기의 공격으로 태어난 기형아들의 사체 등 전쟁의 참상을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박물관 외부>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된 총기들>

 

전쟁 당시에 쓰였던 고엽제는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다이옥신이 함유된 화학적 불순물로 0.15g 만으로도 치사량에 이른다. 이것은 독극물로 알려진 청산가리의 1만배, 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이다.

 

<'오렌지 에이전트'의 피해 아동들, 현재>

고엽제의 무서운 점은, 독소가 체내에 유입된 후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축적되어 10~25년이 지난 후에도 각종 암, 신경계 손상, 기형을 유발하고 독성이 자녀에게 까지 유전된다.

 

 

베트남 전쟁의 서막(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불리는 베트남 독립전쟁(1946.12.19~1954.8.1)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와 호치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간의 전쟁으로 베트남 연합군이 중화민국에게 도움을 청하여 북쪽에서는 공산군이 내려오고, 당시 지도자가 없었던 남부에서는 프랑스인을 풀어주고 재무장시켜 북쪽은 베트남인, 남쪽은 프랑스인이 장악하여 8년간 전쟁을 하였다.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퇴한 뒤,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거하여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였다.

 

1954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 이후 북부에는 호치민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고, 남부에는 괴뢰항제 바오 다이를 총리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로써, 북위 17도선(베트남 군사분계선) 이북은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이남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 공화국이 통치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사분계선, 회색부분>

 

베트남 전쟁( 2차 인도차이나반도 전쟁)

1964 8 2일 통킹만 해상에서 해군 135편대 소속의 북베트남 해군의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선제 공격하였다. 이 교전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적 3척 손상 및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나, 미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사상자는 없었다.

 

8 4, 당시 통신 감청기관인 NSA의 소나(어뢰공격 탐지기구) 담당 병사가 배의 프로펠러 소리를 착각하여 어뢰공격이 있었다고 보고하고 이를 2번째 교전으로 인지하고 8 7일 미국 하원은 4140의 지지로 통킹만 결의를 하고 상원은 이를 통과시켰다. 사실상, 이는 북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베트남 전쟁이 국제 전이되는 원인이 되었다.

 

 

<통킹만 결의, 사실상 학살의 예고였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참전

박정희 정부 하에서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으로 1964 9 11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 4월까지 4차 파병에 걸쳐 5,099명이 사망하고, 1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1차 파병 당시에는 1개 의무중대 및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는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 파견 및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지원단 및 백구부대 등 1개군단 병력을 파견하여 베트남 참전 8년간 총 31 2853(최대 5만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이 미국 다음으로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국군 해외파견을 통한 경제적 이익으로 경공업 육성, 수출 장려정책 및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을 이루었으나, 다수의 사상자 그리고 159,132명의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참전용사를 낳았다.

 

 

 

 

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전사자의 8배에 가까운 4만여 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당시 언론들은 10:1 눈부신 전과라며 ‘자랑스러운 대한의 남아’ ‘무적 따이한으로 보도했다. 당시 동맹국이었던 미군 조차도 한국군은 교전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면 끝까지 추격해서 마지막 명까지 사살했다.”, “한국군은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느 지역에 베트콩이 있다고 알려지면 지역의 아무에게나 총을 쏘는 그런 식이었다.” 등의 평가를 내렸다.

 

참전 장병의 말에 따르면, 한국군에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발생하면 설령 마을이 베트콩과 무관한 마을이라고 해도 보이는 대로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한 뒤에 죽였다고 한다.

 

참전 당시 한국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해외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됐던 부분이다. 오죽했으면 남베트남 군의 사단장은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베트남 군에게 한국군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한국군이 4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고 당시 국내 언론들은 자랑스럽게 보도했지만, 사실 이중에는 9천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살한 민간인은 크게 다음의 4 성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중에서 꽝남성에서만 희생자의 절반가량인 4,500명이 학살되었고, 나머지 성들에서 1,700명씩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이들 학살이 일어난 지역마다 오늘날에는 증오비 위령비등이 세워져 있다.

 

<한국군이 9,000 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4개성>
<꽝응아이 성, 증오비(죄악증거비)>

-죄악증거비-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마치며..

최근 베트남에서는 BTS를 필두로 한 K-POP, 런닝맨 등 한국 미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베트남 내 번화가 어디에서도 한국 음식점, 잡화점 등등 한국문화를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박항서 감독이 이끌고 있는 베트남 국가대표 팀 또한 선전하며 대한민국의 기상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도 남의 나라이고,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라는 인식에 있어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갑질과 안하무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가끔 보이는 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인으로써, 우리의 과거 잘못을 이해하고 반성하며 그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며 항상 우리가 베트남에서 손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